The History | 수도회 역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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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교육과 돌봄의 시대 1955 ~ 1985
1960년대 성가수도회의 가장 괄목할 만한 역사는 부산 수도회 지원 설립과 수도회본원 건물신축이다. 부산지원에서는 목회활동 지원과 함께 유치원교육 등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했다. 수도회 서울 본원 신축은 제4대 구세실 주교가 유산 8,000파운드를 기증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가수도회가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수도 생활의 새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는 수도회의 활동 규모(성베드로학교 지원, 인천 성안나의집 개원)와 수도회의 기능과 역할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는 수녀들의 활동을 더욱 요구하고 있었다.
교회활동 폭을 넓히는 의미에서 이천환 한인 초대주교는 1973년 2월 25일 성가수도회 모든 종신서약 수녀들에게 감사성찬례에서 보혈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수녀들이 각 교회 사목에 크게 기여하도록 했다.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남, 여 기숙사는 후에 수도회에서 운영하여 수녀들의 교육 활동이 되었다. 후에 기숙사는 여학생만을 위해 축소 운영되었으나 현대인을 위해 1970년 현대식 건물로 준공 봉헌되고 1972년 부속건물을 증축했다. 그러나 1972년 구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고, 신축된 기숙사는 1975년 서울교구 자산 활용 계획에 의해 폐원되었다. 여기숙사 성모관은 더 축소되어 수녀원 내에서 운영되다가 1985년 운영을 중단했다. 1967년 3월부터 6년간은 서울대성당 성니콜라 유치원을 수녀들이 전담 운영하였다.
성가수도회는 전쟁 전·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953년 6명의 지원자들의 입회로 활력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1966년 5월 1일 손모니카 수녀의 종신서약과 1969년 10월 4일 성가수도회 역사상 처음으로 5명의 수녀가 함께 종신서약을 함으로써 성가수도회 원칙과 규칙에 의한 합법적인 정식 총회가 구성되었다.
1970년 11월 25일 윤애은 수녀, 오카타리나 수녀가 종신서약을 했다. 초창기 역사를 만들어온 다섯 수녀의 뒤를 이어 제2의 기초를 닦은 8명의 수녀들은 사실상 수도회 기능면에서 새로운 기틀을 만들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성베드로수녀회’가 주로 의료봉사, 사회사업, 전도활동을 했듯이 성가수도회 역시 50년 역사 동안 전도활동에 가장 큰 역점을 두면서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수녀들의 대외활동도 활발했다. 1969-1975년 서울YWCA 종교부에서 성경공부와 특강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1973-1977년에는 교회여성연합회 활동에 참여했다. 1980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호주 멜버른 대회에 참석했는데, WCC는 기독교 각 교파들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교류와 협력을 주장하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이다.
교육과 돌봄의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수도회의 가장 큰 기여는 전쟁의 상처 속에서 고난 당하던 어린이들을 돌봄과 교육으로 ‘성피득보육원’ 봉사와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전해주는 ‘복음전도’의 역할이었다. 이는 초대 마리아 클라라 수녀가 강조하여 당부한 전도 활동이다. 특히 실향민들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주고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믿음의 관계를 열어주는 일은 무엇보다도 수녀들 몫이었다. 당시 수도회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교회에 나가 사제를 돕고, 신자들을 심방하며, 함께 기도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었으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전도 활동이었다. 조마가 주교는 성가수도회의 활동 원천은 기도가 되어야 하며, 수도회가 전도에 힘을 쏟기를 당부하셨다.